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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의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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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우산을 쓰고 은행나무 아래에 서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흔적이나 은행잎들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그 빗방울과 은행잎만큼이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과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채로 나를 기다리게 만들 때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좁고 어두운가
빗방울 소리만큼이나 작은 나의 세상에 메여
나는 어떤 것들을 붙잡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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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당신과의대화/시 | 2011/06/08 10:27
Posted by Poucet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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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길을 걷다가, 거울을 보다가
문득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잊었다 생각했던 견디기 힘든 꿈들이
나를 마주보고 있을 때.

후회와 회환이란 결국 꿈 때문이라는,
하루하루의 삶이 점점 꿈에서
멀어져가기 때문이라는 현실.

신분증에 담기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내가 스스로 바라는 내가 아니라면
내가 바라는 나는 누구인가.
저작자 표시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는 소박함을
알게 하소서
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
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
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
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
소리로 요란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주소서
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
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
남 몰래 키워가는 비밀 하나를
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그들 곁에 순한 바람으로
머물게 하소서
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 또한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할 뿐입니다.
저 들판에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청풍에 살던나무』제3문학사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한다는 말이,
들판에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믿음을 지키고자 한다는 말이,
내 가슴에 와서 박혔다.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하나를 바르게 가르치려는 소박함.
그것이 내게도 있었으면 싶다.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방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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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언젠가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릴지도 모른다는 저 구절이

가슴에 와 박혔다.


가끔 무엇이 그리운지도 모른 채

한없이 무엇인가 그리워서 잠 못 들어본 적이 있기에.


깊은밤 멍하니 음악을 듣다가

평생 함께해 온 나 자신을 한 번쯤 돌이켜 감상에 빠져보았기에.


내 마음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누군가의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이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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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김경주,

아무도 모른다, 김사인

당신과의대화/시 | 2010/06/07 16:05
Posted by Poucet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문장'(http://www.munjang.or.kr/)에서 받아보는 시들 중,
매번 바빠서 미뤄두었다 한꺼번에 보곤 하지만,
그래도 참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많다.

사라지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남들보다 조금은 큰 것 같은 나로서는
이 시가 그림처럼, 영화의 장면처럼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래의 링크로 가셔서 시인의 육성으로 들어보시길.

그 마음이 하나하나 느껴져서, 다가올 것이다.



시인의 육성 낭송 플래시 + 시 원문보기
http://letter.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10&OrgView=yes&pI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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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cet

하루를 살아가며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적인 생각들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을 제목달고 포장하여 올리는, 나만의 감성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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